계안나 - 별의 별 짓, 인터뷰, 2018
8월 18일까지 역삼동 소피스갤러리에서 열린 아티스트 캐스퍼 강의 전시 제목은 이랬다. ‘별의 별의 별의 별’. 초대장에는 한지 위에 별똥별이 떨어지는 순간을 표현한 듯한 추상 회화 작품 사진이 담겨 있었다. 탄소, 질소 등으로 뭉쳐진 밤하늘의 ‘별’인가, 보통과는 다르다는 뜻의 ‘별’인가. 아티스트 캐스퍼 강이 지은 제목의 ‘별의 별’은 과연 무엇인가. 갤러리에서 만난 캐스퍼 강은 대답 대신 한 장의 종이를 건넸다. 구글 시학(Google poetics)이라 불리는 것으로, 구글 검색창에 검색어를 타이핑하면 알고리즘에 따라 이어지는 단어 또는 문장을 시로 만든 것이다. 사람들이 실제 검색한 내용을 바탕으로 하기에 그 조합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별들’이라 적으면 ‘별들 너머 이쪽저쪽 별들 사이에서 별들에게 물어봐라’라는 말이 나오고, ‘별것’이라 치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별것도 아닌 일’이라 나온다. 그 문장에는 사람들의 비밀, 수치, 희망, 염원 등이 담겨 있다. 책상에 올려놓은 그 종이는 “밤하늘의 ‘별’인가, 별스러움의 ‘별’인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게 무엇이 됐든 보는 이에 따라 ‘별난’ 시 같은 존재가 된다는 것이 중요하다”라는 말을 대신하는 듯했다.
캐나다에서 자라 건축학을 전공한 후, 2004년 한국으로 건너와 아티스트로서 활동하기 시작한 캐스퍼 강. 그는 고국이자 낯선 타국으로서 바라본 한국에서 과거의 것, 잊힌 것을 작품 주제로 삼았다. 초기 관심은 한국 전통 민화나 동양 산수화였다. 그는 이를 정밀한 선과 건축 설계도 같은 구성으로 재해석한 작품을 만들었는데, 혼자 작업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고 완성도가 높다. “1년 전부터 본격으로 한지를 다루었어요. 전에도 한지에 그림을 그렸지만 이번 <별의 별의 별의 별> 전시에서는 본격적으로 등장합니다. 한국적이거나, 익숙한 소재라서 한지를 택했다기보다 제가 표현하고 싶은 개념을 구현하기에 가장 적합한 재료라서 선택했죠. 락스로 표백하고, 불로 태우고, 석회질 가루와 섞는 등 여러 시도를 하면서 원래 특성을 완벽하게 벗어난 한지의 물성을 작품에 활용했어요. 태운 한지의 재조차 작품의 일부가 되죠.” 한국어가 어눌해 거듭 미안하다고 했지만, 단지 표현이 서투를 뿐. 자신의 작업 과정, 철학을 말할 때 그의 눈빛은 거침이 없었다. 실제 작업 또한 일사천리로 이루어진다. 한지를 보는 순간 어떤 형태와 어떤 질감을 가지고 표현할지, 이를 위해서는 어떤 단계의 작업이 필요한지, 건축학도답게 명확한 프로세스와 가장 합리적인 방법으로 작품을 만든다. “작업 10년 차부터는 감각과 내면의 목소리를 따라가는 식으로 작업하고 있어요. 물성과 일시성에 초점을 두고 최대한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명상하듯 작업합니다.”
명상하듯 작업한다는 그의 말은 독립 큐레이터 세인트 루이스(St. Louis)의 전시 전문을 읽자 더욱 확실히 이해되었다. ‘캐스퍼 강의 작품에서 한지는 여러 가지 물리적인 변화를 겪었어도 여전히 한지로서 고유의 특성은 잃지 않는다. 작가는 불가피하게 소멸하는 재료의 상태에 개입해 필연적으로 그 끝을 보류함으로써 시간성이 유효하지 않은 ‘중간 상태(in-between)’, 즉 구조적으로 ‘현재 완료 진행(present perfect progressive)’을 만든다. 그렇게 함으로써 시각적 결과는 즉각적이며 심미적으로 작가의 개입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흔적을 남긴다.’ 한지를 조심스럽게 태우고, 어느 순간 물을 적셔 타다 남은 재의 흔적을 남기는 일. 그는 불로 태워 만든 한지 구멍에 물질적으로는 비어 있고, 심리적으로는 공허하며, 시간적으로는 임시적인 순간을 담는다. 이는 작가가 개입함으로써 ‘현재 완료 진행 형태’를 만드는 일. ‘개입’했다 해서 ‘의도’했다고 할 수는 없다. 물, 선풍기 바람 등 한지를 태우고 멈추는 것은 또 다른 물리 작용이다. 그렇게 우연과 필연이 만든 형상은 채워진 것 같지만 동시에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캐스퍼 강은 ‘영원한 것을 이해하려면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것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심오한 철학과 성찰이 담긴 작품을 만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런 메시지는 보는 자의 몫이다.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시구 같은 그의 작품은 보는 이에 따라 다양한 해석을 남긴다. 초대장에 등장한, 4개의 피스로 구성한 대형 사이즈 작품은 나에게 별똥별이 떨어지고 있는 모습 같았다. 태양계를 떠돌던 먼지가 지구의 중력에 붙잡혀 대기와 마찰을 일으키며 불을 뿜어내고 있는 모습.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나타나서 밤하늘을 밝히고 서서히 소멸하는 시간 덩어리. 빛을 내면서 타들어가는 황홀하고 기이한 ‘별’것으로 보였다.
한지를 태우고, 표백하고, 붙이는 등 노동집약적인 복잡한 과정을 거쳐 완성했지만, 겉으로는 전혀 그런 과정이 느껴지지 않아요. 매우 담담한 표정을 하고 있네요. 여러 부분에서 기존 캐스퍼 강의 작품과 구분되는 것 같습니다. 보다 더욱 추상적이고 개념적으로 느껴집니다.
이번 개인전에서 소개한 작품은 한지를 주로 사용했다는 것 외에도 여러 면에서 기존 작업과 차이가 있어요. 스스로도 작업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졌고요. 민화 이미지 작업을 한 초창기에는 하루 종일 작업실(작업실이자 그의 집이기도 하다)에서 작품에 빠져 만족할 만한 작업이 완성될 때까지 파고들었는데, 이번에는 결함 없는 완성도를 추구하기보다 예측할 수 없는 결과물을 내고자 했어요. 한지로 다양한 실험을 하면서 우연한 결과를 드러내는 방향으로 작품을 완성했죠. 여러 재료를 활용하고, 이미지를 중첩시키는 등 복잡한 과정은 그만큼 제가 그동안 축적한 생각의 부피 같다고 할까요.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복잡한 내면을 지닌 사람 같은 거죠. 한지를 태우는 작업은 순간적인 것, 시간을 얼려버리는 것 같은 개념을 형상화하기 위해 발전시킨 방법이에요. 보이고 안 보이는 것, 채워진 것과 비워진 것, 임시적인 것과 영원한 것. 전형적인 상관관계를 깨고 싶었어요.
그런 생각을 표현하는 데 한지가 용이한 재료인가요? 한지는 민화나 산수화 이미지를 사용했던 과거처럼 ‘한국적인’ 것을 드러내기 위함은 아닌가요?
민화, 산수화도 그렇고 이번 한지도 그렇고, 한국 전통을 이야기하거나 과거의 것을 복원하기 위해 사용한 것이 아닙니다. 한국적인 것을 보여주고 싶다는 의도도 없고요. 그저 지금, 이 순간에 관심이 있습니다. 교포로서 한국에서 오래 지내면서 더욱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이미지와 물건을 재료로 활용하는 것이죠. 한지는 과거나 지금이나 어떤 재료보다 회화 작업에서 가치 있는 재료라 생각해요. 1년 전부터 조금씩 작업에 사용했는데, 이번에는 본격적으로 등장시켰죠. 일부러 한지의 특성을 연구해 한지에 최적화된 방법을 적용하지는 않았어요. 여러 가지 실험을 해본 끝에 한지의 특성 때문에 드러나는 효과를 차용했죠. 검게 그을린 고리 자국을 만들기 위해 조심스럽게 태우기도 하고, 파쇄하고 다시 뭉쳐 섬유 덩어리로 이용하기도 하고, 대리석 가루와 섞어 팔레트 나이프로 쌓을 수 있을 만큼 두꺼운 재질의 칠 재료로 만들기도 하고요. 원래 한지의 모습과 특성과는 매우 달라졌지만, 그런 특성을 지녔기에 탄생한 새로운 한지죠.
복잡한 작업 과정은 어떻게 발전시킨 것인가요? 전시 서문에는 즉흥적이고 우발적인 과정에서 완성된 예측 불가능한 결과물이라고 되어 있네요.
최종 결과물은 상상할 수 없었어요. ‘시간을 붙잡고 싶다’, ‘영원한 순간을 깨뜨리고 싶다’ 등 개념적인 생각만 있었죠. 그런 느낌을 떠올리며 한지를 대하다 보면 그 방법이 생각납니다. 태우겠다, 표백을 하겠다, 물감을 칠해야겠다, 등 생각이 들면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하는지, 매우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방법이 떠오르죠.
계안나 (매거진 <아트마인> 콘텐츠 디렉터)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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