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필균 - Art in Culture 2023년 9월

한지, 회화와 건축의 연결 고리

캐스퍼 강이 별이라 부르는 살갗을, 나는 머나먼 행성에 적막한 사막에 과묵한 언덕에 바람이 남긴 그리운 결이라 읽겠다. 바람결에서 회화는 낯선 귀환자가 별을 측량하는 발자국이다. 드넓은 사막 지평선을 가로지르는 궤적에서 세계를 기록한 흔적, 검붉은 그을림을 껴안은 지도는 목적과 기능이 없는 조건으로 자신을 편집하고 불특정한 맥락 일부로 편입한다. 오래된 사물이자 그 재료로 재생산된 종이가 전시 체계에서 다른 건축 요소와 상보(相補)함은 결국에 결핍을 인식하는가.

캐스퍼 강은 벽(壁)이자 창(窓), 판(板)이자 면(面)인 사물을 만든다. 문득 그는 벽보다 창이, 판보다 면이 만들기 어렵다는 사실을 마주한다. 대지의 배를 가르고 새벽으로 고개 내민 생명이 활기차게 운다. 화면 중심을 가로지르거나 가장자리를 따라 한지 섬유가 움튼다. 시간을 조직하는 자는 그의 흔적에서 사물의 흥망성쇠를 목도한다. 이는 영겁으로 치환되어 생명과 죽음을 순례한다. 귀환자의 지도는 미완성이다. 층과 층 사이 벽에 희푸른 기다림만이 울창하다. 한지를 배경 재료에서 표현 재료로 전환하는 역전 또한 단순히 평평한 판을 만드는 기술에서 나아가 행위의 인위성을 낮추고 원재료의 순수성을 드러낸다. 정제된 미감에서 면이 빚어진다.

회화는 전통적으로 벽에 칠하거나 거는 ‘벽’이자, 창으로 열거나 닫는 ‘창’이다. 벽과 창을 중첩하는 이중창 혹은 칸막이로서 회화는 건축이 세운 경계를 유보하거나 때로 그것에 편입하는 장치다. 여기서 건축은 단순히 물리적 공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건축을 기존 질서로, 회화를 새 질서로 이항하는 체계는 전시 주체가 체계를 재감각하는 장치에 가동을 주문한다. 그 중심에 한지가 있다. 닻을 내리는 한지 작업은 바닥과 수직으로 일어서 칸막이로 기능하는 한편, 근래 그 유통 시장에서 상품 다양성이 위축하는 또 다른 멸종 위기 순간과 겹쳐 전통을 지연하는 현대적 의례로 나아간다.

빛이 있는 곳에 물음이 흐른다. 회화와 건축은 직물의 감촉을 드러내는 우화(羽化)로 무엇이 되고자 하는가. 지도와 지도를 이어 붙인 판에 이어 닥종이 배접 혹은 자개 옻칠로 감싼 시멘트 벽돌은 공간에 군상을 이룬다. 돌 뼈에 종이 살이 붙은 구조물 한편에, 새벽을 밝히자 반대편에 저녁이 켜진다. 캐스퍼 강이 설계한 조명은 반투명한 닥종이 섬유 조직에 벽돌 그림자로 도시와 세포 조직체(tissue) 단면 이미지를 중첩한다. 행성 가득 울리는 숨소리는 연쇄적인 우연인가. 사물과 물성에 질문하는 캐스퍼 강의 빛은 건축이 호흡하는 숨구멍을 개방하고 뿌리를 탐문한다.

건축 일부로서 존재와 가까워지는 종이는 오래된 사물로서 해독이 필요하지 않다. 기성 매체가 문화적 관습과 일치하거나 어긋나는 경계에서 캐스퍼 강은 오래된 사물이 지니는 특별한 지위를 전복하는 방법을 모색한다. 문화적 유전을 드러내는 지표가 조형 언어로 재배열하는 장면은 그에게 어떤 의미일까. 그의 작업에 전통은 현전하지만 부재하고, 부재하지만 현전한다. 문득 당신이 여러 고리와 고리를 엮어서 만든 그물을 늘어뜨리는 낚시꾼으로 보인다. 당신은 무언가를 낚았을까, 아니면 무언가에 낚였을까. 또 다시 반복. 철저하게 이용된 돌은 처절하게 죽어간다. 밀물이 남긴 염색과 계절풍이 남긴 균열을 나이테 삼아 닻을 내리고, 해변에 쓸려온 시간의 부피를 가늠한다.

어제 다다른 2022년 해변에 이어 오늘의 해변에서도 전망대 계단을 오른다(캐스퍼 강의 바다 앞 전망대는 하나로 부족할까). 승강기를 범용하는 건축 시대에서 노출된 계단은 특별한 사물이다. 벽을 따라 계단을 오르는 여행자는 계단 중간 칸에 캐스퍼 강이 연출한 사슬과 고리를 지나 위층에 도달한다. 전시에서 사선으로 상승하고 하강하는 길은 해변을 부감하는 전망대다. 

오늘 다시 찾은 해변에서 누군가의 선율이 흐른다. 선율은 파도 소리를 덮는다. 혁명가보다 자장가에 가까운 그것은 파도가 모래알에 부딪히는 울음과 웃음을 지운다. 당신과 나눈 대화를 표백해 가는 선율은 강제로 꺾인 나뭇가지가 폭력을 다시 마주하게 한다. 나는 침울한 연주를 그저 수용하지 않고 부단히 거슬러 당신이 속삭이는 소리에 귀 기울이는 일이 필요함을 깨닫는다. 숲과 사막, 혹은 그 어딘가에서 만난 당신은 얼마나 나를 멀리 비약시키는가. 가늠할 수 없다.

백 필 균